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15) – 배 루도비코 수사

시복시성 대상자 약전 >>> 시복시성 예비심사에 올라간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7명, 연길 수도원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 연길 교구 사제 2명의 삶을 소개합니다.

배 루도비코 수사
1902년 10월 23일 생, 독일 로텐부르크 슈투트가르트 교구 출신
세례명: 칼
첫서원: 1924년 10월 15일
한국 파견: 1925년 9월 27일
소임: 덕원 수도원 인쇄소 책임자, 청지원자 책임
체포 일자 및 장소: 1949년 4월 28일, 덕원 수도원
순교 일자 및 장소: 1950년 10월 11일, 평양 인민교화소

 

배 루도비코(Ludwig Fischer, 裵, 1902-1950) 수사는 1902년 10월 23일 독일 로텐부르그-슈투트가르트Rottenburg-Stuttgart 교구 마르크트루스테나우Marktrustenau 본당에 속한 운터쉬텔츠하우젠Unterstelzhausen에서 태어나 칼Karl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벤델린Wendelin과 어머니 헬렌네Helene는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두 아들은 커서 수도성소를 받았다. 큰 아들은 발트브라이트바흐Waldbreitbach에 있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작은 아들인 루도비코 수사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7세부터 제화장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제화공 견습을 받았다. 1922년 제화기능사 자격을 딴 그는 고향에서 형과 함께 일했다.

그 이듬해 루도비코 수사는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입회청원서에 이렇게 적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했고, 이에 대해 심사숙고했습니다.” 본당 주임신부 역시 수도자로서의 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하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훌륭한 청년이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이 살았습니다. 윤리적으로 올바르고 신심이 깊기에, 수도생활과 선교활동에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여 1923년 10월 14일 루도비코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다. 1924년 10월 15일 그는 첫서원을 했고, 1925년 9월 27일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9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파견된 10명의 수도형제들과 원산에 새로운 수녀원 설립을 위해 파견된 4명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과 함께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수도원에서 그는 구둣방 책임을 맡아 일했다.

서울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온 후 새해 첫날, 1928년 1월 1일 그는 한국인 방삼덕 빈첸시오 수사(方三德, 1898-1970)와 종신서원을 했다. 그의 유능함은 덕원에서 빛이 났다. 그는 덕원에서 구둣방 뿐 아니라 한국인 평수사 지원자 책임과 인쇄소 책임을 맡았으며 수도원 운전기사 노릇까지 하였다. 특별히 인쇄소는 그의 주된 소임이었다. 그는 식자, 인쇄, 제본까지 맡아서 많은 책을 간행했다. 인쇄소는 번창하여 1937년 새로운 작업장을 마련하였고, 1940년에는 새 인쇄기를 들여놓았다. 1940년 보고에 따르면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 천주교 교리문답 3만부, 미사경본 1만부가 발간되었고 호교론에 관한 책이 5천부 가량 팔렸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 인쇄소 때문에 그는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자 그리스도인들은 생존을 걱정했다. 1948년 12월 원산 내무서는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를 씌워 다 고베르트 엔크 당가 신부를 체포했다. 그러나 더심각한 문제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넘어갈 무렵 인쇄소에서 발생했다. 어느 날 직원 하나가 종이를 가득 담은 자루를 질질 끌고 산으로 가는것을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가 보고 루도비코 수사에게 알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갔다. 3월 중순에 직원 둘이 잡혀갔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유인물을 인쇄했다는 혐의였다. 이어서 4월 28일 현장책임자 루도비코 수사가 체포되었다. 모든 게 보위부가 꾸민 흉계였다. 반공주의자로 가장한 정치보위부원들의 꼬임에 인쇄소 직원들이 넘어간 것이다.

이 일을 빌미로 덕원 수도원은 공산정권을 전복하려는 불순분자들의 집단으로 공공연하게 낙인찍혔다. 결국 5월 9일과 11일 정치보위부원들이 두 차례에 걸쳐 수도원을 수색하였고, 독일인 수도형제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 교화소로 보냈다. 루도비코 수사는 4월 28일에 이미 평양으로 압송되어 독방에 갇혔고, 나중에 잡혀온 수도형제들과 전혀 접촉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에게 세탁사역이 부과되었다.하루는 힘든 일을 하다가 양말이 완전히 찢어지자 그 꼴이 초라해 간수에게 부탁했다. “대우가 뭐 이렇습니까? 우리 집으로 소식을 전해 주면 내게 필요한 더 많은 것을 보내줄 것입니다. 소식 좀 전해 주십시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덕원 수도원 폐쇄 사실을 전혀 몰랐다. 수도원 자기 방에 십자가 대신 김일성 초상화(북한 공산당국은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를 접수하고 그곳에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현 원산농업대학)를 설치하였다.)가 걸려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와 유죄판결을 받은 7명의 수도형제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계속 수감되었고, 나머지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후 그의 신상에 대한 소식은 임근삼 콘라도(林根三, 1919-1986) 수사에게 몰래 보낸 쪽지 편지가 전부이다. “임 수사 앞,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루도비코 수사가 썼습니다. 루도비코 수사 O.S.B.” 그게 마지막이었다. 6.25전쟁이 터지고,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기 직전인1950년 10월 11일 아침, 그는 어디론가 끌려 나갔는데 살해되었음이 분명하다.

자료출처: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芬道通史(분도출판사, 2010년)

분도 2010년 겨울호 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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